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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유산 관리와 사후 데이터 보호

한국에는 ‘디지털 유산법’이 없다? 사각지대 들여다보기

by info-search-blog1 2025. 4. 14.

한국에는 ‘디지털 유산법’이 없다? 사각지대 들여다보기

2024년 초, 한 40대 직장인이 갑작스레 사망하면서 유족들은 예상치 못한 문제에 부딪혔다. 고인은 네이버 블로그와 유튜브 채널을 통해 월 수십만 원의 광고 수익을 올리고 있었고, 별도로 클라우드 서버에 수많은 디자인 파일과 사진을 저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족은 이들 콘텐츠에 대한 접근 권한도, 수익 정산도, 저작권 문제도 아무런 법적 기준 없이 떠안게 됐다. 문제의 본질은 단순했다. 한국에는 사망한 개인의 디지털 자산을 보호하거나 관리할 수 있는 명확한 법률, 즉 ‘디지털 유산법’이 없다는 점이다.

아직도 민법?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는 법 체계

한국의 상속 관련 기본법은 민법이다. 그런데 민법은 디지털 이전 시대에 만들어진 법이다. 1960년대에 제정된 민법은 상속 재산을 ‘유체물’ 중심으로 정의한다. 부동산, 예금, 증권 등 물리적이고 전통적인 자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 때문에 구글 계정, 클라우드 저장소, 카카오톡 메시지, 유튜브 채널과 같은 디지털 자산의 상속에 대해서는 사실상 아무런 직접적인 규정이 없다.

법원은 이런 공백을 기존 민법의 일반 규정으로 해석해 채우고 있다. 예컨대 이메일 계정도 일종의 ‘사용계약’으로 간주해 상속이 가능하다고 본다. 하지만 이는 명확한 법률이 아니라 해석에 불과하다. 실제로는 플랫폼의 약관, 유족의 요구, 사망자의 의사 등이 충돌하며 수많은 혼란을 빚는다.

플랫폼 약관과 충돌하는 유족의 권리

구글, 애플, 페이스북(현 메타), 네이버, 카카오 등 디지털 플랫폼은 대부분 자사의 약관에 따라 계정 처리 방식을 정한다. 예를 들어 구글은 생전에 사용자가 ‘Inactive Account Manager’를 통해 사망 후 계정 처리를 미리 지정하지 않은 경우, 유족에게도 쉽게 접근 권한을 부여하지 않는다. 개인정보 보호와 보안이 가장 우선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족의 입장에서는 고인의 생애가 담긴 사진, 메시지, 수익이 발생하는 콘텐츠에 접근하지 못하는 것은 부당하다. 실제로 사망자의 클라우드 계정에 저장된 가족 사진조차 열람하지 못해 소송까지 간 사례도 있다. 유족의 정서적 고통은 물론, 경제적 손실까지 발생하는 것이다.

 

한국에는 ‘디지털 유산법’이 없다? 사각지대 들여다보기

입법 시도는 있었지만…

국회에서 디지털 유산 관련 법안을 발의한 적은 있다. 2020년 이후 몇몇 의원들이 ‘디지털 자산 상속 법률’을 제안했으나, 대다수는 상임위조차 통과하지 못하고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핵심 쟁점은 ‘사생활 보호 vs 상속인의 권리’, 그리고 **‘기업의 서버 접근 허용 범위’**다.

또한 디지털 자산은 무형 자산이기 때문에 평가 기준도 불분명하다. 예를 들어 유튜브 채널이 수익을 낸다고 해서 이를 상속 가능 자산으로 본다면, 저작권·계정 소유권·광고 수익 정산 기준 등 복잡한 문제가 함께 발생한다. 이러한 복합성을 이유로, 한국의 입법은 여전히 이론적 논의 단계에 머물러 있다.

해외는 어떻게 하고 있을까?

미국은 앞서 언급한 RUFADAA(통일 디지털 자산 접근법)를 통해 거의 모든 주에서 디지털 자산 상속을 법제화했다. 유언장이나 수탁자 계약을 통해 디지털 계정에 대한 접근 권한을 명시할 수 있도록 했다. 독일은 연방대법원에서 페이스북 계정을 상속 대상이라고 명확히 판결했다. 일본도 2021년부터 ‘디지털 자산 정리 가이드라인’을 통해 디지털 유산 관리의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이들 국가는 공통적으로 **“디지털 자산은 기존 상속 법제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원칙 아래, 법률·판례·약관 간 조화를 시도하고 있다.

 

 

결론: 이제는 법의 시간이다

디지털 자산은 점점 더 많은 사람의 삶을 구성하고 있다. 누군가의 이메일은 유언보다 더 많은 정보와 의사를 담고 있고, 블로그나 유튜브 채널은 단순한 취미가 아닌 ‘경제적 자산’이 되었다. 그러나 한국의 법은 여전히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개인의 죽음 이후에도 그 사람의 데이터와 콘텐츠는 계속 존재한다. 이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법적 기준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시작은 ‘디지털 유산’이라는 개념을 법적으로 정의하고, 보호할 수 있는 새로운 법률의 제정이다. 한국도 이제 이 논의에서 더 이상 뒤처져서는 안 된다.